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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전ㆍ국순전 [ 孔方傳ㆍ麴醇傳 ] 이건 무엇인가요?

다양한 정보7 2012. 10. 10. 17:16

 

1. 작가

임춘(林椿 : ?~?)
강좌칠현(江左七賢), 즉 자연에 파묻혀 살아가는 일곱 명의 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던 고려시대 문인.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다. 주요 저서로 『국순전』, 『공방전』 등이 있다.

 

 

 

2. 공방전(孔方傳)

1) 작품

공방의 자는 관지(貫之:꿴다는 뜻)니, 그의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의 굴속에 살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황제(黃帝) 때에 최초로 초빙되어 채용되었으나 성질이 강경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황제가 관상쟁이 신하로 하여금 그의 관상을 보게 하니, 그 신하가 한참 동안 그를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산과 들에 아무렇게나 자란 바탕이라 아무리 씻고 닦고 하여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폐하께서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를 풀무 속에 넣고 녹여서 변화시킨 뒤에 광채를 내게 한다면 본래의 자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임금은 신하를 임용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이 그 자질과 됨됨이를 따라 변화도 시키고 키우기도 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는 그를 무딘 동(銅)이나 쇠붙이와 같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황제가 관상쟁이의 말에 따라 그를 풀무 속에 넣고 변화시킨 결과, 공방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뒷날 난리를 만나 다시 강물 가의 용광로로 옮겨갔는데 이때부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공방의 아버지 천(泉)은 주(周)나라의 대재(大宰)가 되어 나라의 세금을 맡아 다스렸었다. 공방은 그 됨됨이가 바깥쪽은 둥글고 안쪽은 모가 났는데, 시대에 따라 그의 직책이나 역할도 변화하였다. 저 한(漢)나라 때에는 홍로경이 되었는데, 당시에 오왕(吳王) 비가 교만하고 아첨을 잘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때라 공방이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

호제(虎帝) 때에는 온 천하가 흉년이 들어 모든 창고가 비자, 임금이 걱정하여 공방을 부민후(富民侯)로 삼고,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 머무르게 하였다. 근(僅)은 늘 공방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가형(家兄)’이라고 불렀다. 공방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염치가 없어서 나라의 재산을 총괄하게 되매 ‘자모경중법(子母輕重法)’이라는 저울에다는 법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옛날과 같이 용광로에 넣어서 일정한 틀에 녹여 부을 필요가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저울 눈금을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고 물건값을 마음대로 좌우하게 하여 결국에는 곡식을 천히 여기고 자신을 중히 여기게 하였다. 동시에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농사의 중요성을 방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간관(諫官) 등이 그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그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방은 또 권세 있는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그들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권력을 빙자하여 벼슬을 사고팔게 하니 모든 권력이 그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마침내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아치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아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한 문권이 산처럼 쌓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물건을 받았는데 상대방의 인간됨이 어떤가를 따지지 않았음은 물론 시정(市井)의 잡배들이라도 재물만 많으면 다 사귀었다. 그리고 때로는 시골의 건달패들을 따라다니면서 활 쏘고 장기 두고 바둑 두는 일도 협조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방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이 중하다.”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즉위하자 공우(貢禹:간의대부)가 상소하였다. “공방이 그동안 오래도록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나 농사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물품을 교환하는 이익만을 추구하니, 나라와 백성에 해가 되어 공사(公私)가 모두 위험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뇌물이 횡행하여 청탁이 공공연히 행해집니다. 곧 ‘천한 자가 짐을 진 채 수레에 오르니 도둑이 노릴 것은 뻔한 일이다.’라는 말은 『주역』에 분명히 씌어 있는 교훈입니다. 바라건대 그의 관직을 빼앗아 그의 탐욕스러움을 징계하소서.”

당시에 곡식을 중요시하는 정책으로 벼슬길에 나와서 국경의 군비를 충당하는 정책을 세우려던 자가 공방의 일을 질투하여 공우의 상소에 찬성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상소를 윤허하였다. 벼슬길에서 쫓겨나게 된 공방은 그의 문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동안 우리 임금님을 만나 홀로 천하를 경영함에 있어서 국가의 경비를 충족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지금 하찮은 죄로 축출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등용이 되든 축출을 당하든 간에 나에게는 하등의 손익이 없다. 다행히도 나의 목숨은 실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주머니의 아가리를 틀어막고 가만히 들어앉은 채 먼 강가의 조그마한 마을로 돌아가겠다. 그리하여 낚시나 놓고 개울가에서 놀다가 물고기가 잡히거든 술이나 사서 마시겠다.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상인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놀면서 나의 평생을 마치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비록 천종록(千種祿:많은 재물)과 오정식(五鼎食:다섯 솥의 음식)을 준다고 한들 이 즐거움에 비하겠는가? 어떻든 내가 시행하던 정책은 오래지 않아 다시 계속될 것이다.”

 

 


화교(和嶠)가 그의 기풍을 소문으로 듣고 많은 재물을 들여 그를 주머니 속에 간직하며 아꼈는데, 마침내 그를 사랑하는 벽(癖)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포(魯褒)가 그를 논박하고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저 완선자[阮宣子:진(晉)나라 원수(阮修)]는 성품이 호방하여 속물(俗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방의 무리와 지팡이를 끌며 같이 노닐다가 술독 근처에 가면 그만 술을 사서 마시곤 하였다. 또한 왕이보[王夷甫:진(晉)나라 왕건(王愆)]는 공방을 상대하면 창피하다고 하여 공방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이놈의 물건(阿楮物).”하고 불렀으니 청담론자(淸談論者)들이 공방을 천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당(唐)나라가 일어나자 유연(劉宴)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는데 나라의 재물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다시 공방의 정책을 실시하면 국가 경제가 편리해질 것이라고 간청하였다. 이 말은 『식화지(食貨志)』에 실려 전한다. 당시에 공방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의 문도(門徒)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찾아내어 다시 등용하니 그 정책이 개원ㆍ천보(開元ㆍ天寶:713~755) 연간에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고 임금은 조서를 내려 공방의 벼슬을 조의대부 소부승으로 추증하였다.

남송(南宋) 신종(神宗:1068~1086) 때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이 국권을 잡자 여혜경(呂惠卿)을 끌여 들여 함께 정사를 다스려 나갈 때에 청묘법(靑苗法)을 만드니 세상이 매우 시끄럽고 나라 경제가 곤궁하여졌다. 소식(蘇軾:소동파)이 그 폐단을 엄하게 논박하여 모두 배척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모함을 당하여 벼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뒤로 조정의 선비들이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다가 사마광(司馬光)이 정승으로 들어오자 청묘법을 폐하고 소식을 등용하기를 청하였다. 공방 무리의 세력이 차츰 쇠퇴해지고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공방의 아들 윤(輪)은 성품이 경박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는데 후에 수형령(水衡令)이 되었다가 장물(臟物)이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2) 갈래 및 주제

(1) 갈래 : 가전체.
(2) 성격 : 전기적, 풍자적, 우의적.
(3) 제재 : 돈.
(4) 주제 : 경세(經世)에 대한 비판, 즉 돈의 경제 사정에 끼치는 영향 및 운용 과정에서 일어난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

3)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엽전(존)을 의인화하여 ‘돈의 폐해’를 비판하려 한 가전체 소설이다. 돈이 가진 이중성에 대한 평가가 우의적으로 드러나 있다. 즉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이 돈이 결국 인간을 타락시키는 결과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방’은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로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이익을 좇는 일에만 종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천하게 여겼던 시정의 사람들과도 사귀기도 하는데, 이는 ‘공방’이 단순하게 ‘돈’을 드러낸다든다 탐욕스러운 한 전형적 인간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사물로 여기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돈의 내력과 성쇠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상을 풍자하는 경세의 효과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4) 인물의 특징

(1) 당시 주화의 모양이 대개 둥근 모양에다 복판에 네모진 구멍이 있어 그 둥근 모양을 ‘공(孔)’이라 하여 상징적이며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네모진 구멍을 ‘방(方)’이라 하여 그 성씨에 알맞게 방정한 인물로 인격화하였다.
(2) 이러한 소재의 인격화가 내포하고 있는 함축성과 해학성, 그리고 상징성과 비유성은 고려 가전체 소설의 특징이다. 그로 인한 차원 높은 문학적 세계를 산출한 것은 가전체 소설 작가의 비범한 작가적 역량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5) 공방전의 서사 양식으로서의 특징 : ‘전(傳)’의 사실성과 ‘우화(寓話)’의 윤리성의 결합

(1) 한 인간의 생애를 다루듯이 공방의 생애를 그려나가는 것은 서사성의 원리를 따른 것.
(2) 돈을 의인화시켜서 인간적인 품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일종의 우의적인 표현법.
(3) 돈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각성을 의도.

6) 공방전에 반영된 현실인식

돈의 용도가 올발라야함을 강조한 경제관념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다.

7) 「공방전」에 나타난 작가 정신

(1) 임춘은 「공방전」에서 돈이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자기와 같은 불우한 처지에서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세태를 비판하고, 벼슬을 해서 나라를 망치는 무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2) 임춘은 무신 란에서 피해를 입은 귀족의 잔존 세력에 속하였다. 몰락을 겪고 구차하게 살아가노라고 화려한 공상이나 관념적인 사고의 틀을 개고, 구체적인 사물과의 일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처지를 나타내는 방법을 택해야 했었다. 그의 「국순전」이 술을, 「공방전」이 돈을 의인화한 것이라는 것은 그의 삶을 염두에 두면 그리 우연만은 아니다. 현실에서의 불만(관료들의 부정, 의종 시절의 부패)이 자기 주위의 접하기 쉬운 생활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8) 고사나 역사적 인물을 작품 속에 삽입한 서술 방식의 효과

(1) 허구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뢰감 부여.
(2) 주제를 강하게 표출하는 수단이 됨.
(3)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

3. 국순전(麴醇傳)

1) 작품

국순(麴醇)의 자(字)는 자후(子厚)이다. 그 조상은 농서(隴西) 사람이다. 90대조(九十代祖)인 모(牟)가 후직(后稷)을 도와 뭇 백성들을 먹여 공이 있었다. 『시경(詩經)』에, “내게 밀과 보리를 주다.”한 것이 그것이다. 모(牟)가 처음 숨어살며 벼슬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먹으리라.”하여, 밭에서 살았다. 임금이 그 자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서(詔書)를 내려 안거(安車)로 부를 때, 군(郡)과 현(縣)에 명하여 곳마다 후하게 예물을 보내게 하였다. 신하를 시켜 친히 그 집에 나아가, 드디어 방아와 절구[杵臼] 사이에서 교분을 정하였다. 화광동진(和光同塵)하게 되니, 훈훈하게 찌는 기운이 점점 스며들어서 온자한 맛이 있어 기뻐 말하기를, “나를 이루어 주는 자는 벗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다.” 하였다.

드디어 맑은 덕(德)으로써 들리니, 임금이 그 집에 정문(旌門)을 표하였다. 임금을 따라 원구(園丘)에 제사한 공으로 중산후(中山侯)에 봉해졌다. 식읍(食邑)은 일만 호(一萬戶)이고, 식실봉(食實封)은 오천 호(五千戶)이며, 성(姓)은 국씨(麴氏)라 하였다. 5세손이 성왕(成王)을 도와 사직을 제 책임으로 삼아 태평 성대를 이루었고, 강왕(康王)이 위(位)에 오르자 점차로 박대를 받아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후세에 나타난 자가 없고, 모두 민간에 숨어살게 되었다.

위(魏)나라 초기에 이르러 순(醇)의 아비 주(酎)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서,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그를 조정에 끌어들여 말할 때마다 주(酎)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침 어떤 사람이 임금께 아뢰기를, “막이 주와 함께 사사로이 사귀어, 점점 난리의 계단을 양성합니다.”하므로, 임금께서 노하여 막을 불러 힐문하였다. 막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신이 주를 좇는 것은 그가 성인(聖人)의 덕이 있기에 수시로 그 덕을 마셨습니다.”하니, 임금께서 그를 책망하였다. 그 후에 진(晋)이 이어 일어서매, 세상이 어지러울 줄을 알고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유령(劉伶), 완적(阮籍)의 무리들과 함께 죽림(竹林)에서 노닐며 그 일생을 마쳤다.

순(醇)의 기국(器局)과 도량은 크고 깊었다. 출렁대고 넘실거림이 만경 창파(萬頃蒼波)와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며, 자못 기운을 사람에게 더해 주었다. 일찍이 섭법사(葉法師)에게 나아가 온종일 담론할 때, 일좌(一座)가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드디어 유명하게 되었으며, 호(號)를 국처사(麴處士)라 하였다. 공경(公卿), 대부(大夫), 신선(神仙), 방사(方士) 들로부터 머슴, 목동, 오랑캐, 외국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보는 자는 모두가 그를 흠모하여, 성대(盛大)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醇)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추연하여 말하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 하였다. 그가 당시 세상에 애중(愛重)됨이 이와 같았다.

태위(太尉) 산도(山濤)가 감식(鑒識)이 있었는데, 일찍이 그를 말하기를, “어떤 늙은 할미가 요런 갸륵한 아이를 낳았는고. 그러나 천하의 창생(蒼生)을 그르칠 자는 이 놈일 것이다.”라 하였다. 공부(公府)에서 불러 청주 종사(靑州從事)를 삼았으나, 격의 자리가 마땅한 벼슬자리가 아니므로, 고쳐 평원 독우(平原督郵)를 시켰다. 얼마 뒤에 탄식하기를, “내가 쌀 닷 말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 소아(小兒)에게 향하지 않으리니, 마땅히 술 단지와 도마 사이에서 서서 담론할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그 때 관상을 잘 보는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 얼굴에 자줏빛이 떠 있으니, 뒤에 반드시 귀하게 쓰이리라.”

이에 진퇴(進退)와 수작이 조용히 임금의 뜻에 맞는지라, 위에서 깊이 받아들이고 이르기를, “경(卿)이야말로 이른바 곧음[直] 그것이고, 오직 맑구나. 내 마음을 열어 주고 내 마음을 질펀하게 하는 자로다.”라 하였다. 순(醇)이 권세를 얻고 일을 맡게 되자, 어진 이와 사귀고 손님을 접함이며, 늙은이를 봉양하여 술ㆍ고기를 줌이며, 귀신에게 고사하고 종묘(宗廟)에 제사함을 모두 순(醇)이 주장하였다. 위에서 일찍 밤에 잔치할 때도 오직 그와 궁인(宮人)만이 모실 수 있었고, 아무리 근신(近臣)이라도 참예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위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사를 폐하고, 순은 이에 제 입을 재갈 물려 말을 하지 못하므로 예법(禮法)의 선비들은 그를 미워함이 원수 같았으나, 위에서 매양 그를 보호하였다. 순은 또 돈을 거둬들여 재산 모으기를 좋아하니, 시론(時論)이 그를 더럽다 하였다.

위에서 묻기를, “경(卿)은 무슨 버릇이 있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의 벽(癖)이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의 벽이 있었고, 신(臣)은 돈 벽이 있나이다.”하니, 위에서 크게 웃고 권고(眷顧)가 더욱 깊었다. 일찍이 임금님 앞에 주대(奏對)할 때, 순이 본래 입에 냄새가 있으므로 위에서 싫어하여 말하기를, “경이 나이 늙어 기운이 말라 나의 등용을 감당치 못하는가?”라 하였다. 순이 드디어 관(冠)을 벗고 사죄하기를, “신이 작(爵)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마침내 망신(亡身)할 염려가 있사오니, 제발 신(臣)을 사제(私第)에 돌려주시면, 신(臣)은 족히 그 분수를 알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위에서 좌우(左右)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나왔더니, 집에 돌아와 갑자기 병들어 하루 저녁에 죽었다. 아들은 없고, 족제(族弟) 청(淸)이, 뒤에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벼슬이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고, 자손이 다시 중국에 번성하였다.

 

 

2) 주제 및 의의

(1) 연대 : 고려 중엽.
(2) 갈래 : 가전(假傳).
(3) 성격 : 풍자적.
(4) 표현 : 의인법.
(5) 구성 : 일대기를 중심으로 한 순차적 구성.
(6) 제재 : 술(누룩).
(7) 출전 : 『하서선생집』, 『동문선』.
(8) 주제 : 향락에 빠진 임금과 이를 따르는 간신들에 대한 풍자.
(9) 의의 : 현전하는 가전체 문학의 효시.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영향을 끼쳤다.

3) 내용 및 감상

(1) 내용: 술을 의인화. 계세징인을 목적으로 지은 가전. 국순의 조상은 청렴결백을 가훈으로 자손에게 교시하여 가문의 치욕을 막게 했으나, 순은 얕은 지혜로 조상의 유풍을 망각하고 경망스러웠다. 어린 몸으로 일찍이 등과했으나, 마땅히 물러설 줄을 몰랐으며, 오히려 그의 오만과 무지는 왕실과 국정을 어지럽히다가 마침내 버림을 받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2)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향락만을 일삼던 당시의 임금 의종을 풍자하는 동시에, 오만과 불손, 문약(文弱)과 방탕, 음모와 아부로써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마침내 무단정치를 유발한 간신배를 질책한 것이라 하겠다.

 

4) 「국순전」에서 풍자(諷刺)의 대상

(1) 표면적(表面的) :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 풍자.
(2) 이면적(裏面的) :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 당시의 여러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벼슬아치들의 발호와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의 산물. 즉, 요사한 벼슬아치와 방탕한 군주를 풍자. 뛰어난 인물이 오히려 소외되는 현실을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