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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변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 영웅 이건 누군가요?

다양한 정보7 2012. 10. 17. 14:15

너희가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 나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 있지 못할 거야. 너희는 나를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아빠는 소신껏 행동했고, 내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단다. 아빠는 너희가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 세계 어디선가 또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늘 기억해 주기 바란다.’ 체 게바라라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자기 아이들에게 남긴 편지인데 너무나 비장하지? 체 게바라는 무엇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걸까?

 

 

 

라틴아메리카의 시련 - 고통받는 라틴아메리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당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은 대부분 민주 공화제를 선택했어. 그러나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만 지키는 군부 독재1) 정권인 경우가 많았어. 그런데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가 확산되자, 라틴아메리카에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독재 정권을 지원했어. 그러다 보니 미국에 의존해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잇속을 채우기에 급급해 부정부패가 심해졌지. 사람들은 가난과 정부의 억압 속에 쿠데타2),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어.

 

 

 

쿠바 혁명 - 미국의 뒷마당에서 혁명을 꿈꾸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게바라는 의대에 입학했어. 의대에 다니던 중 두 번에 걸쳐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라틴아메리카 곳곳을 여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특히 미국 소유의 광산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모습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지. 이후 게바라는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세상을 치료하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심하게 돼. 그러던 어느 날 코스타리카에서 우연히 쿠바 사람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면서 1959년에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끌었어.

당시 쿠바는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때문에 쿠바 국민들은 가난과 정부의 억압이라는 이중 고통 속에서 힘겨운 날들을 보냈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쿠바 혁명은 여러 나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 이후 게바라는 쿠바의 개혁에 힘쓰다가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 다시 떠났어. 그가 아르헨티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쿠바나 다른 나라의 혁명에 참여한 것은 라틴아메리카를 독립된 여러 나라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는 1967년 볼리비아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활동하던 중 정부군에 잡혀 총살되고 말았어.

 

 

 

더 알아보기피델 카스  트로와 체 게바라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식민지가 되었고, 가장 늦게 독립한 나라였어. 그러나 독재 정권과 미국 때문에 진정한 독립을 못 이루었지. 카스트로는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일으키면서 “나는 내 형제의 생명을 앗아간 독재자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라.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대. 그러나 권력을 잡은 카스트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로 기네스에 오르는 독재자로 바뀌었고, 여전히 쿠바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 혁명은 혁명을 낳았으나…

쿠데타로 무너진 칠레의 사회주의 실험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은 곧 다른 나라로 빠르게 퍼졌어.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과 군부 독재에 저항했어. 깜짝 놀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라틴아메리카에 많은 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어. 하지만 미국은 미국과 친한 세력을 지지하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정권을 바꾸고 싶을 때 군부 쿠데타를 지원할 뿐이었어.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칠레는 1970년대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을 이루어 냈어. 국민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아옌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거야. 아옌다 대통령은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정책들을 실시했어. 심각한 빈부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고, 모든 주요 자원과 미국계 거대 기업을 나라 소유로 만들었어. 이러한 정책에 국민들은 뜨겁게 지지했지만, 미국의 미움을 받았어.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수만 명이 죽고, 아옌다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지. 결국 칠레의 사회주의 실험은 미국의 힘 앞에 실패로 끝나고 만 거야.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46년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이전에 군사 정부가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 페론은 노동·사회 복지 장관을 맡아서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 덕분에 국민들에게 인기가 치솟았지만 군사 정부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지. 페론을 석방하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석방하고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를 실시했어.

대통령에 당선된 페론은 예전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지도록 노력했어. 영국과 미국의 손에 넘어간 아르헨티나의 주요 기업을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돌려주었어. 그러나 페론은 어느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독재자로 바뀌어 가고 있었어. 결국 그는 1955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9년 만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아르헨티나는 18년 동안 대통령이 아홉 번이나 바뀌는 혼란이 계속되었어.

읽을 거리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연인, 에비타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은 국민들에게 영원한 ‘퍼스트 레이디’로 사랑받는 사람이야. 가난한 배우 출신인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기금을 모으고,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어. 그래서 국민들은 그녀를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했고, 부통령 후보로까지 추대4)했어. 그러나 암으로 34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나 뮤지컬로 만들어져 사랑받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