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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 뜻 소개해 드려요

다양한 정보7 2012. 10. 18. 14:14

 

한국의 수도.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성이 있었다. 한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문화의 자취가 인정되고, 한강 남안의 암사동 유적 등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어 석기와 즐문무늬 토기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백제는 A.D. 1세기에 위례성을 두고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게 침략을 받아 광주로 옮길 때까지의 수도였으나 백제 한산성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시의 동남쪽 교외의 풍납동 토성과 그 남쪽 4km의 잠실지구에 있는 고분군은 모두 백제 초기의 것이라 한다.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576) 16년에 한산주를 정하고 또한 북한산 정상에 순수비(경복궁으로 이전)를 세웠다.

 

 

 

 

신라 통일 후 경덕왕(재위 742~765) 때에 한양군을 두었고 남한산에 산성을 축조했다. 고려는 개성을 수도로 하였으나 일찍부터 정치, 경제의 요지로서 이 땅을 중시하고 처음 양주, 후에 남경이라 불러 15대 숙종(재위 1095~1105) 말년에는 천도가 계획되었을 정도였는데 후에 행궁을 두고 한양부라 칭하였다. 이성계(조선 태조, 재위 1392~98)는 재위 3년에 개성에서 천도하여 한성부라 칭하고 인구 11만 8000여를 동원하여 성곽과 성문을 건설하고 경복궁의 신궁 여러 전(殿)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2대 정종(재위 1398~1400)은 덕수궁을 세우고 또 3대 태종(재위 1400~18)은 창덕궁과 후원인 비원을 조영했다. 9대 성종(재위 1469~94)은 흙으로 만든 성곽을 석축으로 개축하고 또한 창경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 · 정유의 난(1592, 1597) 등에 의하여 이들 건축은 거의 모두 소실되고, 후에 광해군(재위 1608-23) 때에 재건했다. 1946년부터 서울이라 부르고 특별시로 되었다. ‘서울’이라는 단어는 『3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보이는 국호의 서라벌, 서벌(나라, 도성의 뜻)과 동의라 한다. 현재 시 동쪽과 북쪽의 성곽은 대부분 수복되고 또한 조선시대의 수표교(장충단 공원에 이건), 전천교(성동구), 원각사 10층석탑(파고다 공원으로 이전) 등이 보존되어있다. 서울에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등이 있고 근교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각 대학 부속박물관, 회화, 도자 전문의 간송미술관, 민화를 주로 하는 에밀레 박물관 등의 미술관계기관이 있다.

 

 



숭례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성의 정문으로서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건물 한체의 크기나 되는 높은 석축 기단(台基) 중앙에 아치형의 홍문이 있고 그 위의 목조루는 정면 5간×측면 2간. 본래는 팔작식이었으나 기동조(寄棟造)로 개조함. 기둥은 모두 원주. 두공은 전형적인 다포양식이고 하층보다 상층을 호화롭게 장식했다. 1963년 보수 때에 발견된 묵서의 상량명(銘)에 의하여 태조5년(1397)에 창건되고 세종30년(1448)에 개수되었음이 판명되었다.

 

 



흥인지문
시 동부의 종로구에 있다. 한성의 동문으로서 동대문이라고도 한다. 숭례문과 거의 같은 구조이고 높은 석축 기단 위에 2층으로 되어있다. 두공은 다포양식. 하층의 바깥은 삼수선(三手先). 안쪽은 이수선(二手先), 상층은 내외 모두 이수선(二手先)임. 문밖의 정면에 반원형의 옹성이 있는 것이 특색. 태조 원년에 창건되었으나 현재의 건축은 이조 말기 고종 6년(1869)의 개축에 의한 것이다.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시 중앙의 종로 2가에 있고 원각사의 석탑이 이전되어 있다. 원각사는 조선시대 세조(재위 1455~ 68)가 태조 창건의 흥복사 자리에 세운 절인데 석탑은 안평대군(1418~53)의 발원에 의한 것이라 하며, 고려시대 경천사지 10층석탑(1348 건조, 현재 경복궁내)의 정확한 모방품이다. 또한 원각사비는 세조10년에 원각사 창건의 사적(事跡)을 적은 것으로, 서거정 찬(撰), 정란종 서(書)이다.